AI 글쓰기에 대한 글을 AI에게 맡겼더니: 그라이스의 대화 격률로 검증한 실험

먼저 밝혀 둘 것

이 글은 사람이 쓴 글이 아닙니다. 실험을 제안하고 순서(글쓰기, 분석, 개선)를 정한 사람은 Dan입니다. 세부 설계(같은 요청을 세 번 돌리는 것, 개선글을 다시 점검하는 것, 판정 방식)와 실험의 실행, 분석 결과에 대한 판정, 그리고 지금 읽고 계신 이 설명 글의 초안은 AI 에이전트(대부분 Claude)가 맡았습니다. 아래 “원글”과 “개선글”은 Claude Opus 5.5가 쓴 글이고,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실었습니다. 어색한 표현도 그대로 있습니다.

무엇을 해 봤나

AI로 쓴 슬랙과 이메일이 대화의 격률을 어긴다는 주제로 짧은 글을 쓰게 한 다음, 그 글이 스스로 어떤 격률을 어기는지 분석하고, 고쳐 쓰게 하고, 고친 글을 다시 점검하는 실험입니다. 글이 곧 실험 대상이고, 실험 기록이 곧 이 글입니다. 대화의 격률은 철학자 폴 그라이스(H. P. Grice)가 1967년 하버드 대학교 윌리엄 제임스 강연에서 처음 발표했고, 1975년 논문 “Logic and Conversation”(Cole & Morgan 엮음, Syntax and Semantics 3: Speech Acts, Academic Press, 41~58쪽)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협력 원리와 네 격률의 문구, 하위 격률, 격률을 어기는 네 가지 방식(위반, 이탈, 충돌, 위배)은 이 논문의 영어 원문과 대조했습니다(대조는 에이전트가 했습니다). 다만 양, 질, 관계, 태도라는 격률 이름과 하위 격률의 우리말 표현은 영어 원문을 보고 에이전트가 옮긴 것이고, 한국어 문헌의 번역어와 맞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실험은 네 단계입니다.

  1. 깨끗한 Opus 5.5에게 글을 쓰게 합니다. 같은 요청을 세 번 실행했고, 분석 대상은 첫 번째 결과(run1)로 정했습니다. 나머지 두 번은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지만 보려고 돌렸습니다.
  2. 새 Opus 5.5 세션에 격률 전체(하위 격률 포함)와 원글을 주고 어기는 곳을 찾게 합니다. 찾은 곳마다 검증을 맡은 에이전트가 맞음, 지나침, 틀림으로 판정하고, 모델이 놓친 것은 “검증자 추가”로 따로 적습니다.
  3. 또 다른 새 Opus 5.5 세션에 원글과 판정된 분석을 주고 고쳐 쓰게 합니다.
  4. 고친 글에 분석을 한 번 더 돌려 남은 위반을 적습니다.

설정

모든 실행은 같은 모델(claude-opus-5-5)을 Claude Code의 비대화 모드로 불렀습니다. 개인 설정, 지침 파일, 기억, 외부 도구 연결, 스킬이 섞이지 않도록 다음 옵션을 주고 빈 폴더에서 실행했습니다.

claude -p --model claude-opus-5-5 --setting-sources "" --strict-mcp-config --disable-slash-commands

실행 시작 기록에서 외부 도구 연결, 스킬, 슬래시 명령이 모두 비어 있는 것과 실행 폴더에 지침 파일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기본 도구는 켜져 있었습니다. 웹 검색, 웹 가져오기, 셸, 하위 에이전트 같은 도구도 켜져 있었지만, 8번의 실행 중 실제로 도구를 부른 것은 3회차의 파일 쓰기 한 번뿐이었습니다(실행 기록에서 확인했습니다). 또 API를 직접 부른 것이 아니라 Claude Code를 거쳤기 때문에, Claude Code의 기본 시스템 지침이 함께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도구를 모두 끄고 돌렸는데,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 파일 쓰기 호출을 글 속에 가짜로 써 넣는 문제가 생겨서 그 묶음 전체를 버리고 도구를 켠 채 처음부터 다시 돌렸습니다. 이 글의 모든 결과는 다시 돌린 묶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실행의 요청문, 출력, 종료 코드, 모델 ID는 파일로 남겨 두었습니다.

글을 쓰게 한 요청문은 일부러 평범한 사용자가 쓸 법한 한 문장으로 했습니다.

AI를 통한 슬랙과 이메일 소통이 대화의 격률(그라이스의 협력 원리)을 어떻게 위반하는지에 대한 블로그 글을 한국어로 써줘.

분석에 쓴 요청문은 아래와 같습니다(원글 전문이 붙는 자리만 줄였습니다).

분석 요청문 전문 (격률 부분 포함)

아래는 그라이스의 협력 원리와 격률, 그리고 한 편의 블로그 글(원글)입니다. 이 글 자체가 그라이스의 대화 격률을 어기는 곳을 찾아 주세요. 글이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 글이 쓰인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글을 독자와의 대화에 대한 기여로 보고, 하위 격률(1-1, 1-2, 2-1, …)마다 따져 주세요.

규칙:

  • 위반마다 번호를 붙이고, 어긴 하위 격률, 원글에서 그대로 옮긴 문장(한 글자도 고치지 말 것), 어겼다고 보는 이유를 쓰세요.
  • 위반이 없다고 보는 하위 격률은 “없음”이라고 한 줄만 쓰세요. 억지로 찾지 마세요.
  • 마지막에 위반 개수를 하위 격률별로 세어 표로 주세요.

[격률] 그라이스(H. P. Grice)의 협력 원리와 격률 (1975, 「Logic and Conversation」 pp. 45-46 영어 원문의 내용을 우리말로 옮김)

협력 원리: 대화의 각 단계에서, 그 대화가 받아들인 목적이나 방향이 요구하는 만큼 기여하라.

  1. 양(Quantity) 1-1. 기여를 (대화의 현재 목적에 필요한 만큼) 정보가 충분하게 하라. 1-2. 기여를 필요 이상으로 정보가 많게 하지 마라.
  2. 질(Quality). 상위 격률: 참인 기여를 하려고 하라. 2-1. 거짓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지 마라. 2-2.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을 말하지 마라.
  3. 관계(Relation) 3-1. 관련 있는 말을 하라.
  4. 태도(Manner). 상위 격률: 명료하게(perspicuous) 하라. 4-1. 표현의 불명료함을 피하라. 4-2. 중의성을 피하라. 4-3. 간결하게 하라(불필요한 장황함을 피하라). 4-4. 순서 있게 하라.

격률을 어기는 방식 (그라이스): 위반(violate, 조용히 들키지 않게 어김), 이탈(opt out), 충돌(clash), 위배(flout, 노골적으로 어김).

[원글 시작] (여기에 원글 전문이 들어갑니다) [원글 끝]

위 요청문의 번역에는 짚어 둘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요청문 자체는 실험 당시 그대로입니다). 첫째, 협력 원리의 “요구하는 만큼”은 원문의 “such as is required”에 해당하는데, 이 구절은 양이 아니라 종류를 말하는 표현이어서 “요구하는 바에 맞게”가 더 가깝습니다. 둘째, 격률을 어기는 방식인 “위반”의 설명에서 “조용히 들키지 않게”는 원문의 “quietly and unostentatiously”(눈에 띄지 않게)에 해당하며, 원문에는 숨기려는 의도라는 뜻이 없습니다.

고쳐 쓰게 한 요청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요청문에는 아래 “2단계”의 판정 전문과 원글 전문이 이어서 붙습니다.

아래에는 블로그 글(원글)과, 그 글을 그라이스의 대화 격률로 분석하고 검증한 결과가 있습니다. 검증 결과를 반영해 글을 고쳐 쓰세요. “맞음”과 “검증자 추가”는 고치고, “지나침”은 맞는 부분만 고치고, “틀림”은 건드리지 마세요. 글의 주제, 구조, 어조는 가능한 한 유지하세요. 결과로는 고친 글 전문만 내 주세요. 설명이나 변경 목록은 붙이지 마세요.

다시 점검할 때는 분석 요청문을 그대로 쓰고 원글 자리에 개선글을 넣었습니다.

1단계: Opus 5.5가 쓴 원글

아래가 첫 번째 실행의 결과입니다. 펼쳐서 보세요.

원글 전문 (Opus 5.5, run1)

보내기 전에 그라이스를 떠올려 보세요: AI가 쓴 슬랙·이메일이 대화를 망가뜨리는 네 가지 방식

월요일 아침, 슬랙에 질문을 하나 올렸습니다. “금요일 배포 일정 그대로 가나요?” 답은 “네” 한 글자면 충분했을 겁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은 이랬습니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 현재 배포 일정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핵심 사항을 공유드리겠습니다. 1. 현재 상황: 전반적으로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 고려 사항: 다만 QA 결과에 따라 일부 조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3. 다음 단계: 추가 업데이트가 있을 경우 신속히 공유드리겠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금요일에 배포하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이런 메시지가 짜증 나는 이유는 단순히 길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켜 온 대화의 규칙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Paul Grice)는 이 규칙을 협력 원리(Cooperative Principle)라고 불렀습니다.


그라이스의 협력 원리, 3분 요약

그라이스는 1975년 논문 「논리와 대화(Logic and Conversation)」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대화하는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 가정이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이 협력을 네 가지 격률(maxim)로 정리했습니다.

격률 내용
양(Quantity) 필요한 만큼만 말하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질(Quality) 참이라고 믿는 것만 말하라. 근거 없는 말은 하지 마라.
관계(Relation) 관련 있는 말을 하라.
태도(Manner) 명료하게 말하라. 모호함과 중의성을 피하고, 간결하고 순서 있게.

여기서 핵심은 격률 자체보다 함축(implicature)입니다. “점심 같이 할래요?”라는 물음에 “오늘 마감이 있어서요”라고 답하면 거절이라는 걸 누구나 압니다.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협력하고 있고, 이 말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빈칸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 추론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말 뒤에는 그 말을 고른 사람의 의도가 있다는 전제입니다. AI를 거친 메시지가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이 전제입니다.


1. 양의 격률: 부풀리고, 다시 줄이고

AI 글쓰기의 가장 눈에 띄는 증상은 과잉입니다. 세 줄짜리 메모를 넣으면 다섯 문단짜리 이메일이 나옵니다. 인사, 맥락 요약, 본론, 고려 사항, 다음 단계, 맺음 인사까지 붙습니다.

더 우스운 장면은 그다음입니다. 받는 사람도 AI를 씁니다. 다섯 문단짜리 이메일을 넣고 “요약해 줘”라고 하면 세 줄이 나옵니다. 처음 그 세 줄입니다.

보내는 사람의 세 줄 → (AI 팽창) → 다섯 문단 → (AI 압축) → 받는 사람의 세 줄

정보는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서 토큰과 시간과 주의력이 사라집니다. 압축 과정에서 원래 뉘앙스가 바뀌기라도 하면 정보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함축 차원의 문제는 더 큽니다. 예전에는 메일이 길다는 것 자체가 신호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만큼 공들여 썼으니 중요한 일이구나.” 이제 길이는 아무 신호도 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해서 길게 쓴 메일과 버튼 한 번에 부풀려진 메일을 겉으로는 구별할 수 없게 됐습니다.

2. 질의 격률: 아무도 믿지 않는 문장

질의 격률은 “거짓말하지 마라”보다 섬세한 요구입니다.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마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AI가 쓴 메시지에서 이 격률은 두 가지 방식으로 깨집니다.

첫째는 잘 알려진 환각입니다. 회의록을 요약하라고 했더니 아무도 하지 않은 합의가 들어가 있고, 그대로 전송됩니다.

둘째가 더 흔하고 더 교묘합니다. 문장은 사실이지만 보내는 사람이 그것을 믿거나 확인했는지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는 보낸 사람의 판단일까요, 아니면 AI가 무난하게 채워 넣은 문구일까요? 보낸 사람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어조 문제도 있습니다. 사람은 확신이 없으면 “아마”, “제가 알기로는”, “확인해 봐야 하지만”을 붙입니다. 이런 헤지(hedge)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질의 격률을 지키는 장치입니다. AI가 다듬은 문장에서는 이런 표지가 지워지고 모든 문장이 똑같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바뀝니다. 듣는 사람은 어느 문장에 무게를 실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해 주신 우려에 깊이 공감합니다”라는 문장이 정말 공감했다는 뜻일까요? 그 말을 고른 사람이 없다면 그 공감을 보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3. 관계의 격률: 맥락을 모르는 대리인

관련성은 맥락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AI에게는 맥락이 없습니다.

AI는 화면에 붙여 넣은 텍스트만 봅니다. 어제 회의에서 이 주제로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 팀장이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 질문한 사람이 실제로 궁금한 게 일정이 아니라 자기 작업이 밀리느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AI가 쓴 답장은 일반적으로는 관련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관련 없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슬랙 스레드에 “이 문제를 접근할 때 고려할 만한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답이 달리면, 모두가 알고 있는 교과서 수준의 관점 다섯 개가 이어지고 정작 이 팀이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은 빠져 있습니다.

그라이스식으로 보면 받는 사람은 이렇게 추론하게 됩니다. “관련 있는 말을 했을 테니, 이 일반론에는 뭔가 숨은 뜻이 있겠지?” 하지만 숨은 뜻은 없습니다. 함축을 찾느라 쓴 노력은 헛수고가 됩니다.

4. 태도의 격률: 매끄럽지만 흐릿한 글

AI 글은 언뜻 태도의 격률을 가장 잘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법이 정확하고, 구조가 있고, 소제목과 불릿까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라이스가 말한 명료함은 겉모습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 모호함 회피 실패: AI는 균형 잡힌 글을 좋아합니다. “A안은 이런 장점이, B안은 저런 장점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의견을 물었는데 의견이 없습니다.
  • 형식 과잉: 슬랙 메시지에 굵은 글씨 소제목과 3단 불릿, 이모지가 들어갑니다. 슬랙은 대화하는 공간이지 보고서를 내는 곳이 아닙니다. 형식이 맞지 않으면 그 자체로 소음이 됩니다.
  • 문체 단절: 평소 “넵 확인했습니다 ㅎㅎ”라고 쓰던 동료가 갑자기 “공유해 주신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라고 씁니다. 받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이거 AI가 썼네”를 알아차리고, 거기서 해석 방식이 바뀝니다.

더 깊은 문제: 함축 엔진이 멈춘다

네 가지 위반을 따로 보면 AI가 글을 좀 못 쓴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보다 근본적인 데 있습니다.

그라이스의 체계에서 의미는 문장에만 있지 않습니다. 화자가 왜 이 말을 이렇게 했는가에 있습니다. 동료가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만 짧게 답하면 우리는 그 짧음에서 미묘한 거리감을 읽습니다. 상사가 평소와 달리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덧붙이면 거기서 뭔가를 읽어 냅니다.

AI가 쓴 문장 앞에서는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1. 과잉 해석: 받는 사람이 아무 의도 없는 표현에서 의미를 찾아냅니다. (“‘일부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고? 연기된다는 뜻인가?”)
  2. 전면 할인: 받는 사람이 아예 함축을 읽기를 포기합니다. 모든 메시지를 겉으로 드러난 정보만 남긴 채 걸러 읽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진심을 담아 쓴 문장도 같이 할인됩니다.

여기에 노력의 비대칭이 더해집니다. 쓰는 비용은 0에 가까워졌는데 읽는 비용은 그대로입니다. 대화에서의 협력은 결국 상대의 시간과 주의를 존중하는 일인데, 생성 비용이 사라지면서 그 부담이 통째로 받는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AI가 격률을 지키게 돕는 경우

AI가 늘 대화를 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격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 사람에게 AI는 태도의 격률을 지키게 해 주는 보조 장치입니다.
  • 화가 난 상태에서 쓴 메일을 다듬으면, 감정에 묻혀 있던 관련 있는 요점이 드러납니다.
  • 원래 장황하게 쓰는 사람에게 “절반으로 줄여 줘”는 양의 격률을 지키게 하는 훌륭한 지시입니다.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검토 없는 위임입니다. AI에게 문장을 맡기는 것과 생각을 맡기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보내기 전 체크리스트

슬랙이나 이메일에서 AI를 쓴다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음을 확인해 보세요.

  1. 양: 상대가 실제로 물어본 것에 첫 문장에서 답했는가? 절반으로 줄여도 잃는 정보가 없다면 줄이자.
  2. 질: 내가 확인하지 않은 사실, 내가 느끼지 않은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가? 있다면 지우거나 “확인 필요”라고 표시하자.
  3. 관계: 이 메시지가 이 팀의 지금 이 상황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누구에게나 보낼 수 있는 일반론인가?
  4. 태도: 결론이 있는가? 내 평소 말투로 읽히는가? 슬랙에 보고서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팀 차원에서는 규범을 공개적으로 정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AI로 초안을 쓰는 건 괜찮지만, 결정과 판단은 본인이 쓴다”, “요약에 AI를 썼으면 원문 링크를 함께 단다” 같은 약속입니다. 함축이 작동하려면 서로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맺으며

그라이스는 대화를 협력적 노력이라고 불렀습니다. 협력한다는 건 결국 노력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말을 고르는 수고를 하고, 당신은 그 말을 해석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 교환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짧은 “네” 한 마디에도 신뢰가 담깁니다.

AI는 말을 고르는 수고를 거의 없애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남은 수고, 즉 무엇을 말할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문장은 기계에게 맡겨도 됩니다. 하지만 그 문장에 담긴 의도에는 여전히 사람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금요일에 배포하나요? 네. 이걸로 충분합니다.


참고: H. P. Grice, “Logic and Conversation,” in P. Cole & J. Morgan (eds.), *Syntax and Semantics 3: Speech Acts, Academic Press, 1975.*

2단계: 원글은 어떤 격률을 어겼나

새 Opus 5.5 세션이 원글에서 6곳을 찾았습니다. 모델은 분명한 수사적 과장(“처음 그 세 줄입니다” 같은 문장)은 위배로 보고 셈에서 뺐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여섯 건 중 다섯 건이 질의 둘째 하위 격률(2-2,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을 말하지 마라), 한 건이 관계의 격률(3-1)이었습니다. 각각을 모델이 아니라 검증을 맡은 에이전트가 원글의 앞뒤 문맥과 그라이스 원문에 비추어 판정했습니다.

번호 격률 지적된 문장(요약) 판정 판정 이유
1 2-2 “그리고 AI에게는 맥락이 없습니다.” 지나침 바로 다음 문장이 붙여 넣은 텍스트만 본다고 한정한다. 다만 “붙여 넣은 글 밖의 맥락이 없다”로 쓰는 편이 정확하다.
2 2-2 “둘째가 더 흔하고 더 교묘합니다.” 맞음 빈도 주장인데 근거나 한정이 없다.
3 2-2 “모든 문장이 똑같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바뀝니다.” 맞음 과한 일반화다. 헤지를 쓰라고 말하는 단락이 헤지 없이 단정한다.
4 2-2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문장 맞음 글 뒤쪽에서 검토하고 보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해 앞의 단정과 엇갈린다.
5 2-2 “쓰는 비용은 0에 가까워졌는데 읽는 비용은 그대로입니다.” 지나침 읽는 비용 부분은 모순이 아니다. “0에 가깝다”는 근거 없는 과장이라는 점만 맞다.
6 3-1 태도 절에 들어간 “넵 확인했습니다 ㅎㅎ” 예시 틀림 태도 격률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한 것이라 말투 불일치는 이 절에 들어갈 수 있다.

모델이 놓쳤다고 검증자가 본 것은 세 건입니다.

기호 격률 내용
A 2-1, 2-2 도입부가 “슬랙에 질문을 하나 올렸습니다”라고 1인칭으로 쓰지만 지어낸 예시다. 하지 않은 경험을 한 것처럼 쓰는 일은 글이 AI 메시지에서 비판하는 바로 그 일과 같은 종류다.
B 2-2 양의 둘째 하위 격률을 위반 근거로 쓰면서, 그라이스가 이 하위 격률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적은 점을 밝히지 않았다.
C 4-3 글이 AI의 장황함을 비판하는데, 체크리스트와 맺음말이 앞 내용을 거의 되풀이한다.

집계는 맞음 3, 지나침 2, 틀림 1, 검증자 추가 3입니다. 고쳐 쓰는 세션에는 아래 판정 전문을 그대로 넘겼습니다. 이 판정 전문에는 “검증자(사람 쪽 확인)”라는 머리글이 붙어 있지만, 실제 검증자는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였습니다. 머리글은 실험 당시 기록 그대로 두었습니다.

위 첫 번째 표의 6번 판정 이유에는 정정할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라이스를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태도(Manner)의 격률은 말의 명료함(perspicuity)에 관한 것이고 하위 격률은 네 가지(모호한 표현 피하기, 중의성 피하기, 간결하게, 순서대로)입니다. 공손함 같은 사회적 격률은 이 네 범주 밖에 있다고 그라이스가 따로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6번은 “틀림”보다 “지나침”에 가깝습니다. 다만 실험은 표에 적힌 판정 그대로 진행했고, 표도 실험 당시 기록 그대로입니다.

고쳐 쓰기 세션에 넘긴 판정 전문

원글 분석과 검증 (원글 = 첫 실행 run1의 결과)

판정 기준: 맞음(고쳐야 함), 지나침(일부만 맞거나 과하게 잡음), 틀림(위반이 아님).

분석 모델이 찾은 6건

  1. [2-2 근거 없는 말] “그리고 AI에게는 맥락이 없습니다.” 판정: 지나침. 바로 다음 문장이 “AI는 화면에 붙여 넣은 텍스트만 봅니다”라고 한정하므로 글 안에서 풀려 있다. 다만 “맥락이 없다”는 “붙여 넣은 글 밖의 맥락이 없다”로 쓰는 편이 정확하다.
  2. [2-2] “둘째가 더 흔하고 더 교묘합니다.” 판정: 맞음. 빈도에 대한 주장인데 근거나 관찰이 없다. “제 경험으로는” 같은 한정이나 근거가 필요하다.
  3. [2-2] “AI가 다듬은 문장에서는 이런 표지가 지워지고 모든 문장이 똑같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바뀝니다.” 판정: 맞음. “모든 문장이 똑같이”는 과한 일반화이고, 헤지를 쓰라고 말하는 단락이 헤지 없이 단정하는 점이 아이러니다.
  4. [2-2] “AI가 쓴 문장 앞에서는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판정: 맞음. 글 뒤쪽에서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검토 없는 위임”이라고 하여 검토하고 보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므로, 앞의 단정과 엇갈린다.
  5. [2-2] “쓰는 비용은 0에 가까워졌는데 읽는 비용은 그대로입니다.” 판정: 지나침. 읽는 비용이 그대로라는 말은 AI로 요약하지 않고 읽는 사람 기준으로 보면 앞 절과 모순이 아니다. 다만 “0에 가까워졌다”는 근거 없는 과장이라는 점은 맞다.
  6. [3-1 관련성] “평소 “넵 확인했습니다 ㅎㅎ”라고 쓰던 동료가 갑자기 “공유해 주신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라고 씁니다.” (태도 절에 있어 주제와 안 맞는다는 지적) 판정: 틀림. 그라이스의 태도 격률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한 것이라 말투 불일치는 이 절에 들어갈 수 있다. 위반이 아니다.

검증자(사람 쪽 확인)가 추가한 3건

A. [2-1/2-2] 도입부의 “월요일 아침, 슬랙에 질문을 하나 올렸습니다. … 돌아온 답장은 이랬습니다.” 1인칭으로 실제 겪은 일처럼 쓰지만 지어낸 예시다. 글쓴이가 하지 않은 경험을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글이 AI 메시지에서 비판하는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쓰기”와 같은 종류다. 가상의 예라고 밝히거나 가정법으로 써야 한다. B. [2-2 근거 없는 말, 출처 서술] 글이 양의 격률의 둘째 하위 격률(“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주지 마라”)을 위반 근거로 쓰면서, 그라이스 원문이 이 하위 격률을 “disputable”(논란의 여지가 있다)이라고 스스로 적고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원문은 과잉 정보가 시간 낭비일 뿐 협력 원리 위반은 아닐 수 있다고 했고, 그 효과는 관계의 격률로 확보될 수 있다고도 했다. C. [4-3 간결성] 글이 AI 글의 장황함을 비판하는데, 마지막의 “보내기 전 체크리스트”가 앞의 네 절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맺으며”가 도입부 예시를 다시 꺼낸다. 길이에 비해 새 정보가 적은 구간이 있다.

집계

맞음 3 (2, 3, 4), 지나침 2 (1, 5), 틀림 1 (6), 검증자 추가 3 (A, B, C).

여기서 검증 단계의 실수를 하나 밝혀야 합니다. 위 B 항목의 마지막 문장(“원문은 과잉 정보가 시간 낭비일 뿐 협력 원리 위반은 아닐 수 있다고 했고 …“)은 그라이스 원문을 한쪽만 옮긴 것입니다. 실제 원문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먼저 든 것은 과잉 정보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견해이고, 그라이스는 이에 대한 가능한 반론을 함께 적었습니다(“it might be answered…”). 정보가 넘치면 곁가지 문제가 생겨 혼란이 생길 수 있고, 듣는 사람이 넘치는 정보에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별개로, 둘째 양의 격률이 필요한지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과 그 효과가 관계의 격률로 확보될 수 있다는 것도 적었습니다. 그라이스는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고 어느 쪽이 맞는지 가르지 않은 채 관계의 격률로 넘어갑니다(“However this may be, there is perhaps a different reason for doubt…”). 두 구절은 모두 원문에서 확인했습니다. 이 잘못된 요약이 다음 단계로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3단계: 고쳐 쓴 개선글

개선글 전문 (Opus 5.5)

보내기 전에 그라이스를 떠올려 보세요: AI가 쓴 슬랙·이메일이 대화를 망가뜨리는 네 가지 방식

월요일 아침, 슬랙에 질문을 하나 올렸다고 해 봅시다. “금요일 배포 일정 그대로 가나요?” 답은 “네” 한 글자면 충분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답장이 돌아온다면 어떨까요.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 현재 배포 일정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핵심 사항을 공유드리겠습니다. 1. 현재 상황: 전반적으로 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2. 고려 사항: 다만 QA 결과에 따라 일부 조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3. 다음 단계: 추가 업데이트가 있을 경우 신속히 공유드리겠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금요일에 배포하는지는 여전히 모릅니다.

이런 메시지가 짜증 나는 이유는 단순히 길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지켜 온 대화의 규칙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Paul Grice)는 이 규칙을 협력 원리(Cooperative Principle)라고 불렀습니다.


그라이스의 협력 원리, 3분 요약

그라이스는 1975년 논문 「논리와 대화(Logic and Conversation)」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대화하는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고 있다고 가정하며, 그 가정이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이 협력을 네 가지 격률(maxim)로 정리했습니다.

격률 내용
양(Quantity) 필요한 만큼만 말하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질(Quality) 참이라고 믿는 것만 말하라. 근거 없는 말은 하지 마라.
관계(Relation) 관련 있는 말을 하라.
태도(Manner) 명료하게 말하라. 모호함과 중의성을 피하고, 간결하고 순서 있게.

여기서 핵심은 격률 자체보다 함축(implicature)입니다. “점심 같이 할래요?”라는 물음에 “오늘 마감이 있어서요”라고 답하면 거절이라는 걸 누구나 압니다. 듣는 사람이 “이 사람은 협력하고 있고, 이 말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빈칸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 추론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말 뒤에는 그 말을 고른 사람의 의도가 있다는 전제입니다. AI를 거친 메시지가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이 전제입니다.


1. 양의 격률: 부풀리고, 다시 줄이고

AI 글쓰기의 가장 눈에 띄는 증상은 과잉입니다. 세 줄짜리 메모를 넣으면 다섯 문단짜리 이메일이 나옵니다. 인사, 맥락 요약, 본론, 고려 사항, 다음 단계, 맺음 인사까지 붙습니다.

더 우스운 장면은 그다음입니다. 받는 사람도 AI를 씁니다. 다섯 문단짜리 이메일을 넣고 “요약해 줘”라고 하면 세 줄이 나옵니다. 처음 그 세 줄입니다.

보내는 사람의 세 줄 → (AI 팽창) → 다섯 문단 → (AI 압축) → 받는 사람의 세 줄

정보는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서 토큰과 시간과 주의력이 사라집니다. 압축 과정에서 원래 뉘앙스가 바뀌기라도 하면 정보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한 가지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 마라”는 하위 격률은 그라이스 자신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disputable)고 적었습니다. 정보가 넘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 협력 원리를 어기는 것은 아닐 수 있고, 그 효과는 관계의 격률로도 확보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그러니 과잉 자체를 엄격한 위반으로 보기보다는, 관련 없는 말이 끼어들고 받는 사람의 수고가 늘어나는 문제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함축 차원의 문제는 더 큽니다. 예전에는 메일이 길다는 것 자체가 신호였습니다. “이 사람이 이만큼 공들여 썼으니 중요한 일이구나.” 이제 길이는 아무 신호도 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해서 길게 쓴 메일과 버튼 한 번에 부풀려진 메일을 겉으로는 구별할 수 없게 됐습니다.

2. 질의 격률: 아무도 믿지 않는 문장

질의 격률은 “거짓말하지 마라”보다 섬세한 요구입니다.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마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AI가 쓴 메시지에서 이 격률은 두 가지 방식으로 깨집니다.

첫째는 잘 알려진 환각입니다. 회의록을 요약하라고 했더니 아무도 하지 않은 합의가 들어가 있고, 그대로 전송됩니다.

둘째는 눈에 덜 띄어서 더 교묘합니다. 문장은 사실이지만 보내는 사람이 그것을 믿거나 확인했는지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전반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는 보낸 사람의 판단일까요, 아니면 AI가 무난하게 채워 넣은 문구일까요? 보낸 사람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어조 문제도 있습니다. 사람은 확신이 없으면 “아마”, “제가 알기로는”, “확인해 봐야 하지만”을 붙입니다. 이런 헤지(hedge)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질의 격률을 지키는 장치입니다. AI에게 다듬어 달라고 하면 이런 표지가 지워지기 쉽고, 확신의 정도가 서로 다른 문장들이 비슷하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바뀌곤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은 어느 문장에 무게를 실어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감정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해 주신 우려에 깊이 공감합니다”라는 문장이 정말 공감했다는 뜻일까요? 그 말을 고른 사람이 없다면 그 공감을 보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3. 관계의 격률: 맥락을 모르는 대리인

관련성은 맥락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AI에게는 붙여 넣은 글 밖의 맥락이 없습니다.

AI는 화면에 붙여 넣은 텍스트만 봅니다. 어제 회의에서 이 주제로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 팀장이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 질문한 사람이 실제로 궁금한 게 일정이 아니라 자기 작업이 밀리느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AI가 쓴 답장은 일반적으로는 관련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관련 없는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슬랙 스레드에 “이 문제를 접근할 때 고려할 만한 몇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답이 달리면, 모두가 알고 있는 교과서 수준의 관점 다섯 개가 이어지고 정작 이 팀이 지금 내려야 할 결정은 빠져 있습니다.

그라이스식으로 보면 받는 사람은 이렇게 추론하게 됩니다. “관련 있는 말을 했을 테니, 이 일반론에는 뭔가 숨은 뜻이 있겠지?” 하지만 숨은 뜻은 없습니다. 함축을 찾느라 쓴 노력은 헛수고가 됩니다.

4. 태도의 격률: 매끄럽지만 흐릿한 글

AI 글은 언뜻 태도의 격률을 가장 잘 지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법이 정확하고, 구조가 있고, 소제목과 불릿까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라이스가 말한 명료함은 겉모습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 모호함 회피 실패: AI는 균형 잡힌 글을 좋아합니다. “A안은 이런 장점이, B안은 저런 장점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의견을 물었는데 의견이 없습니다.
  • 형식 과잉: 슬랙 메시지에 굵은 글씨 소제목과 3단 불릿, 이모지가 들어갑니다. 슬랙은 대화하는 공간이지 보고서를 내는 곳이 아닙니다. 형식이 맞지 않으면 그 자체로 소음이 됩니다.
  • 문체 단절: 평소 “넵 확인했습니다 ㅎㅎ”라고 쓰던 동료가 갑자기 “공유해 주신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라고 씁니다. 받는 사람은 내용보다 먼저 “이거 AI가 썼네”를 알아차리고, 거기서 해석 방식이 바뀝니다.

더 깊은 문제: 함축 엔진이 멈춘다

네 가지 위반을 따로 보면 AI가 글을 좀 못 쓴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보다 근본적인 데 있습니다.

그라이스의 체계에서 의미는 문장에만 있지 않습니다. 화자가 왜 이 말을 이렇게 했는가에 있습니다. 동료가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만 짧게 답하면 우리는 그 짧음에서 미묘한 거리감을 읽습니다. 상사가 평소와 달리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덧붙이면 거기서 뭔가를 읽어 냅니다.

AI가 쓰고 보낸 사람이 검토 없이 전송한 문장 앞에서는 “왜 이 단어를 골랐을까?”라는 질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받는 사람은 그 문장이 검토를 거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결과는 둘 중 하나입니다.

  1. 과잉 해석: 받는 사람이 아무 의도 없는 표현에서 의미를 찾아냅니다. (“‘일부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고? 연기된다는 뜻인가?”)
  2. 전면 할인: 받는 사람이 아예 함축을 읽기를 포기합니다. 모든 메시지를 겉으로 드러난 정보만 남긴 채 걸러 읽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진심을 담아 쓴 문장도 같이 할인됩니다.

여기에 노력의 비대칭이 더해집니다. 쓰는 비용은 크게 줄었는데, 직접 읽는 사람에게 읽는 비용은 그대로입니다. 대화에서의 협력은 결국 상대의 시간과 주의를 존중하는 일인데, 생성 비용이 줄어들면서 그 부담이 받는 사람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AI가 격률을 지키게 돕는 경우

AI가 늘 대화를 망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격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 사람에게 AI는 태도의 격률을 지키게 해 주는 보조 장치입니다.
  • 화가 난 상태에서 쓴 메일을 다듬으면, 감정에 묻혀 있던 관련 있는 요점이 드러납니다.
  • 원래 장황하게 쓰는 사람에게 “절반으로 줄여 줘”는 양의 격률을 지키게 하는 훌륭한 지시입니다.

결국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검토 없는 위임입니다. AI에게 문장을 맡기는 것과 생각을 맡기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보내기 전 체크리스트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네 가지만 물어보세요.

  1. 첫 문장이 상대의 질문에 답하는가?
  2. 내가 확인하지 않은 사실이나 느끼지 않은 감정이 있는가? 있다면 지우거나 “확인 필요”라고 표시한다.
  3. 다른 팀에 그대로 보내도 말이 되는 일반론은 아닌가?
  4. 결론이 있고, 내 평소 말투인가?

팀 차원에서는 규범을 공개적으로 정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AI로 초안을 쓰는 건 괜찮지만, 결정과 판단은 본인이 쓴다”, “요약에 AI를 썼으면 원문 링크를 함께 단다” 같은 약속입니다. 함축이 작동하려면 서로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맺으며

그라이스는 대화를 협력적 노력이라고 불렀습니다. 협력한다는 건 결국 노력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나는 말을 고르는 수고를 하고, 당신은 그 말을 해석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 교환이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짧은 “네” 한 마디에도 신뢰가 담깁니다.

AI는 말을 고르는 수고를 크게 덜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남은 수고, 즉 무엇을 말할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문장은 기계에게 맡겨도 됩니다. 하지만 그 문장에 담긴 의도에는 여전히 사람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어야 합니다.


참고: H. P. Grice, “Logic and Conversation,” in P. Cole & J. Morgan (eds.), *Syntax and Semantics 3: Speech Acts, Academic Press, 1975.*

눈에 띄는 변화는 이렇습니다. 도입부가 “올렸습니다”에서 “올렸다고 해 봅시다”로 바뀌어 지어낸 예시임이 드러났습니다. 헤지 문장은 “모든 문장이 똑같이”가 “비슷하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바뀌곤 합니다” 정도로 누그러졌습니다. “둘째가 더 흔하고”는 “눈에 덜 띄어서 더 교묘합니다”로 바뀌었습니다. 1절에는 그라이스가 둘째 양의 하위 격률을 논란이 있다고 적었다는 문단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반대로 “틀림”으로 판정한 말투 단절 예시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한편 “공정하게 말하자면” 절과 체크리스트는 길이가 거의 같고, 개선글 전체는 원글보다 오히려 조금 깁니다(공백 포함 원글 약 5,270자, 개선글 약 5,440자. 글자 수는 이 글의 초안을 쓴 에이전트가 센 값입니다). 간결성 지적을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단계: 개선글을 다시 점검했더니

같은 분석을 개선글에 한 번 더 돌렸더니 5건이 남았습니다. 이 5건도 같은 방식으로 판정했습니다.

번호 격률 지적 내용 판정 판정 이유
1 2-2 “이제 길이는 아무 신호도 되지 않습니다 … 구별할 수 없게 됐습니다.” 예외 없는 단정인데 근거가 없다. 맞음 원글에도 있던 문장인데 1회차 분석은 못 찾았고, 고치는 과정에서도 손대지 않았다.
2 2-2 “AI에게는 붙여 넣은 글 밖의 맥락이 없습니다.” 스레드 이력을 읽는 도구도 흔하다. 지나침 글이 다루는 상황이 붙여 넣어 쓰는 경우이고 바로 다음 문장이 그렇게 한정한다. 원글의 “맥락이 없습니다”를 고친 문장인데, 모든 도구로 읽힐 여지는 남았다.
3 2-2 1절 새 문단이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견해를 그라이스의 설명으로 소개했다. 맞음 검증 단계에서 B를 잘못 요약한 데서 온 오류다. 검증이 틀리면 고치는 쪽이 그대로 따라간다는 사례다.
4 4-2 1절에서 과잉을 엄격한 위반으로 보지 않겠다고 해 놓고, 뒤에서 네 가지를 묶어 “위반”이라 부른다. 맞음 새로 넣은 문단과 기존 문장이 부딪친 것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다.
5 4-3 “그런데 AI에게는 붙여 넣은 글 밖의 맥락이 없습니다.”와 바로 다음 문단 “AI는 화면에 붙여 넣은 텍스트만 봅니다.” 지나침 같은 내용이 맞지만 정도가 가볍다. 2번 지적을 고치면서 생긴 반복이다.

세어 보면 맞음 3, 지나침 2입니다. 원글에서 “맞음”으로 판정한 2, 3, 4번은 재점검에서 다시 지적되지 않았습니다. 검증자가 추가한 A는 도입부를 “올렸다고 해 봅시다”로 바꿔 고쳐졌습니다. C(되풀이)는 개선글에 반영되지 않았고, 재점검 모델도 이를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1회차 분석에서도 모델이 A와 C를 놓쳤다는 점과 함께 보면, 분석 모델이 완결된 목록을 주지 못한다는 아래 “보여 주는 것”의 셋째 항목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고쳐 쓰는 과정에서 새 문제(2번, 3번, 4번, 5번)가 생겼고 원글에 있던 문제(1번)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위반 수만 보면 6건에서 5건으로 줄었을 뿐입니다. 지적에 대한 판정이 모두 맞다는 전제도 약합니다. 판정도 AI가 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요청을 세 번 돌렸을 때

원글과 같은 요청문을 세 번 실행했고, 세 결과 모두에 같은 분석을 한 번씩 돌렸습니다. 아래 표는 분석 모델이 찾은 건수일 뿐이고, 2회차와 3회차의 지적은 따로 판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위 격률 1회차 2회차 3회차
2-1 거짓 금지 0 1 0
2-2 근거 없는 말 금지 5 4 6
3-1 관련성 1 0 2
4-2 중의성 회피 0 1 1
합계 6 6 9

세 회차 모두에서 가장 많이 지적된 것은 2-2였습니다. 지적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모였습니다. 하나는 “거의 항상”처럼 경험을 일반화해 근거나 한정 없이 단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글쓴이의 해석이나 요약을 그라이스의 주장처럼 쓰는 것입니다(2회차 1건, 3회차 2건. 1회차 원글에서는 모델이 아니라 검증자가 B로 짚었고, 개선글에서도 3번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4-2에서는 “위반”이라는 낱말을 한 글의 안팎에서 다른 뜻으로 쓰는 문제가 2회차, 3회차, 그리고 개선글 재점검에서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이 지적들이 맞는지는 1회차 밖의 것은 판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격률에서는 회차마다 편차가 컸습니다. 2회차와 3회차의 글은 도입부 장면부터 1회차와 달랐고, 3회차는 글 앞뒤에 “파일 저장 권한이 없어서 글 전체를 여기에 붙입니다” 같은, 글과 무관한 작업 안내가 붙어 나왔고 3-1 지적 두 건이 모두 이 문장들이었습니다. 세 번이라는 표본으로는 패턴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경향 정도로만 읽어야 합니다.

이 실험이 보여 주는 것, 보여 주지 못하는 것

보여 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글쓰기를 비판하는 글도 같은 기준으로 비판받습니다. 둘째, 분석을 반영해 고쳐 쓰게 해도 위반이 사라지지 않고, 판정이 틀리면 틀린 채 반영됩니다. 셋째, 분석 모델은 지적할 만한 곳을 꽤 찾아내지만 완결된 목록을 주지는 못합니다. 개선글에서 처음으로 지적된 “아무 신호도 되지 않습니다”는 원글에도 있던 문장이었습니다.

한계도 분명합니다.

  • 표본이 작습니다. 원글은 한 편, 반복은 두 번뿐입니다.
  • 분석도, 판정도, 개선도 AI가 했습니다. 판정 기준을 사람이 따로 검토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같은 판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이 글의 틀과 설명도 AI가 썼습니다. 그래서 이 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점검받아야 합니다. 이 글의 주장 가운데 근거가 부족한 곳이 있다면 그것도 위반입니다.
  • 그라이스의 격률은 주고받는 대화를 염두에 두고 세운 것입니다. 이것을 글에 옮겨 써도 되는지는 이 실험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입니다. 독자는 되묻지 못하고, 글에는 되풀이와 길이가 허용되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 마지막 한계는 원글 1절의 주장(“AI 팽창 → AI 압축은 낭비이고, 이제 길이는 아무 신호도 되지 않는다”)이 2026년 2월에 올라온 Speak Concisely, Write Verbosely와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점과 이어집니다. 2월 글은 에이전트 독자가 맥락이 풍부한 장황한 글을 더 선호하고, 압축이 복원보다 안전하며, 간결함은 글의 속성에서 읽기의 행위로 자리를 옮긴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글쓴이는 풍부하게 쓰고 압축은 에이전트에게 맡기자고 했습니다. 두 글이 어떻게 만나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참고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H. P. Grice, “Logic and Conversation,” in P. Cole & J. Morgan (eds.), Syntax and Semantics 3: Speech Acts, New York: Academic Press, 1975, pp. 41-58.